모처럼 영화를 보면서
심장이 쫄깃해지고
묵직한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2017년 작품
쓰리빌보드와 닮았지만 또 다른 수작이다.
영화가 끝나고 습관적으로 주제부터 찾아봤지만
강타당한 머리는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들로 혼란스러웠다.
생존을 위해 저울추를 맞추듯 본능적으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애써 냉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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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줄거리 (스포일러)
이야기도 등장인물도 간단하다.
1923년 아일랜드의 (가상의) 섬, 이니셰린.
멀찍이 보이는 바다건너 본토에서
내전의 포성이 들리는 곳.
이 작은 섬에서 가축 키우고 우유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주인공 파우릭은 여동생과 함께
싱글로 살아가는 평범하고 나이스한 농부다.
그의 즐거움 하나는
오후2시 절친과 펍(Pub)에 들러 맥주 한 잔 마시며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거다.
영화는 그 평범한 일상의 어느 날에서 시작한다.
그날이 전날과 다른 게 있다면
절친 콜름이 갑자기 절교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무슨 상황인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인공은
처음엔 당혹해하다 하루를 보내고
전날이 만우절이라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지만
상황은 리얼의 연속이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를 찾고
이유 없이 용서도 빌어보지만
친구의 반응은 요지부동이다.
갑자기 싫어졌단다.
이젠 보기 싫단다.
그래도 파우릭은 도저히 이해가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도 단호한 것처럼 보이니 일단 거리를 두지만
콜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계속되는 파우릭의 집착에
콜름은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그와 지내는 건 시간낭비라고...
그 시간에 보다 의미 있는
명상을 하고 작곡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그렇게까지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고 자길 괴롭힌다면
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가 삶의 낙이자
의미인 손가락을.
절친으로 부터 갑작스런 절교를 당한
주인공은 외롭고 공허하다.
물론 똑똑한 동생이 함께하고
무엇보다 사랑스런 당나귀가 그 곁에 있지만
친구가 없다는 것은 삶 한 부분의 공백을 의미한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동네바보취급을 받는 도미닉과도 어울린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것 같던 그와의 어울림은
불필요한 문제와 갈등만 더 유발한다.
그럴수록 콜름과의 관계가 더 그리워진다.
작은 섬, 유일한 듯 보이는 펍
그곳에서 파우릭과 콜름은 만날 수 밖에 없다.
서로는 약속대로 외면하지만
파우릭은 콜름의 행동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수많은 사람과는 어울리면서
왜 자기와는 말 한마디 섞으려 하지 않은지.
동네 신부님께도 일러바치는 등
관계회복을 위한 나름의 방법을 강구해보고
화가 나서 술김에 콜름에게 따져 묻기도 하고
그게 또 마음에 걸려 용서도 빌지만
돌아오는 건 문 앞에 던져진 잘려진 손가락.
충격이다. 정말 이 정도일 줄이야!
놀란 그의 동생 시오반이
손가락을 들고 친구를 찾아간다.
하지만 확인하는 건 콜름의 단호함.
그저 자족하며 점점 흘러가는 세월
아무 의미 없이 지루한 인간들과의 어울림
그 속에서 한줌의 평안과 의미를 구하는
콜름은 오히려 착한 오빠 때문에
똑똑한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그녀에게
동정과 연민을 보낸다.
콜름과의 대화는 감정을 속이며 살고 있는 그녀에게
큰 파장을 던져준다.
시간이 좀 지나고 손가락 절단도 좀 잊혀지고
파우릭이 도미닉의 경찰관 아버지에게 맞아 다쳤을 때
여전히 그를 챙기는 콜름의 태도를 보며
퍼우릭은 또 다시 관계회복을 꿈꾼다.
콜름과 친하게 지내던 음대생을 거짓정보로
고향으로 돌려 보내려하고
도미닉의 조언대로 당당하게 살아보려고
콜름을 찾아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따져 묻기로 한다.
마침 콜름이 한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곡도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파우릭은 축하하자며
오후 2시에 펍에서 기다리겠다 제안한다.
콜름의 마지못한 승낙에 도미닉은
그의 친구를 거짓으로 돌려보냈다는 사실을
기쁨에 들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이제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갈 꿈을 꾸면서.
다음날 그의 꿈,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현실 마저
하나씩 무너진다.
먼저 동생이 그를 떠나려한다.
콜름의 행동이 그녀에게 던져준 파장이다.
호수의 정령이 나를 부르고
동네 바보 도미닉의 구애를 받고 보니
동생은 더이상 여기 머물 수 없다는 듯
떠날 결심을 한 것이다.
동생이 떠나는 문제로 다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둘은 콜름과 마주한다.
집 앞 문 앞에 손가락 4개를 던지고 돌아오는 콜름.
이제 다섯 손가락이 잘려진 그는
피를 철철 흘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린 연주를
못하더라도 그와의 절교를 선택한 것이다.
콜름의 그런 태도는
더 큰 절망을 파우릭에게 안겨준다.
잘려진 건 손가락이 아니라
자신 자체였다.
타인에 의한 존재의 부정.
어느 날 극혐이 된 자기 자신.
그런 상황으로 동생은 바로 짐을 싸
파우릭을 떠난다.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도시가
자신과 함께하는 삶보다 좋다는 것이다.
동생을 떠나보내고 돌아와 보니
또 다른 절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콜름이 던진 손가락을 먹다가
사랑하는 당나귀가 죽은 것이다.
모든 세상이 한꺼번에 무너진다.
이 모든 것이 콜름이 앗아간 것이다.
파우릭은 펍으로 콜름을 찾아간다.
손가락이 모두 잘려진 손에서 여전히
피가 흐르지만
다른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자신의 음악 동료들과 어느 때보다도
신나게 연주하는 콜름.
그를 찾아간 파우릭에게
콜름은 이제 손가락이 다 잘렸으니
이젠 정말 모든 것을 끝내고
각자의 길을 가자고 한다.
파우릭은 콜름의 손가락을 먹다
당나귀가 죽었고 그래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한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선전포고를 한다.
매일 친구에게 펍에 함께 가자고 찾아간 오후2시
바로 그 시간에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것이다.
약속했던 오후 2시
파우릭은 공언대로 장작을 가져다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른다.
콜름은 타는 불길에도 요지부동으로 집을 지키고
파우릭은 집 밖에서 나돌던 콜름의 개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집이 불타는 밤
파우릭은 자기와 함께 살러 도시로 오라는 동생에게
거절의 답변을 쓴다.
자기의 고향은 이곳 이니셰린이고,
친구, 동료 모두 이곳에 있다고.
당나귀(제니)와 함께 행복하고.
그리고 슬픈 소식은 동네바보 도미닉이
호수에 빠져 죽어 그에게 뭘 부탁할 수도 없다고.
다음날 아침
파우릭은 콜름의 다 타버린 집으로 갔다.
집이 다 불탔다.
하지만
콜름은 죽지 않고 바다가에서 서있다.
콜름에게 파우릭이 다가간다.
집을 태운 걸로 끝이냐는 콜름의 질문에
집 안에 있어야 끝인데 안그랬지 않냐고 대답한다.
콜름은 내륙에서 들리던 총성소리가
한 이틀 안들린다고 전쟁이 끝날것 같다고 했다.
파우릭은 조만간 또 시작할 것이라했다.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일들도 있는 거니까
그게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콜름은 개를 돌봐줘 고맙다했다.
파우릭은 늘 그렇듯 나이스하게 대답했다.
Anytime!
그들의 전쟁은 끝났지만
(아니, 어쩜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만)
둘은 여전히 화해하진 않은 것 같았다.
(어쩜 이게 진정한 화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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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영화를 보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관계'와 ‘자세’ 에 관한 것이었다.
친구, 애인, 부부, 가족, 동창, 정당, 국가...
한 때는 ‘함께’라는 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던 모임들
소속감이 정체성이자 자부심이던 시절
서로의 가치나 욕구가 변했을 때
우리의 자세
밤 새 골짜기에 눈이 퍼붓고
우리의 사랑이 어디쯤에서 반드시 끝날 때
내 기다림의 자세
언제나 우리가 있는 곳은 섬이다.
그 외로움과 막연함이 둘을 친구로 만들었듯
외로워서건, 무슨 이유건
우리는 함께인 것이 좋았던 시절
그렇게 한 동안의 동행이 끝나고
사랑이라는 게 지겨울 때가 있듯이
가치관과 관계가 거짓말처럼 변했을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질문 같았다.
이념과 이익의 공동체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유야 어쨌건 함께했던 공동체에서
타인의 존재 자체가 싫어질 때.
그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파우릭처럼 절친이라 믿었던 친구가
절교를 선언하는 순간부터
이미 나의 실존은 부인되고
존재의 기반은 무너진다.
나에게 절교를 선언하는 것은
결국 나를 죽이는 일이다.
손가락 자른 것까진 니 몸이지만
나의 동생을 떠나보내고,
나의 당나귀를 죽게 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너의 알량한 가치로 나는 부정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것이 사라졌으니
나 역시 너를 부정해야하는 것이다.
살기위해선 하나만 남아야 하는 것이다.
가장 손쉬운 해결 방법은
떠나는 것이다.
여동생 시오반이 그러하듯
자기를 원하는 곳을 찾아 가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별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어쩜 그곳은 내전 같은
더 큰 살육전이 벌어지는 곳일 수도 있다.
또한 떠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거리는 물리적일뿐
극복해야 할 이유와 의지가 있다면
더 큰 불안의 원인이다.
아무리 도망치고 잠수를 타도.
어쩔 수 없이 부딪혀야 한다면
외면하며 사는 것도 방법이지만
서로 납득하고 용납할 수 있는
합의라는 전제가 있어야한다.
설사 합의를 하여도 서로를 피하긴 쉽지 않다.
영화처럼 작은 섬이 아니어도
소셜 미디어의 발달은
세상을 이미 작은 섬만큼이나
좁은 세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합의되지 않은 변심과 변화
즉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보편적이며 불가피한 방식은 전쟁이다.
장미전쟁이건 내전, 세계대전이건.
파우릭과 콜름은 문제 인식이 다르듯
문제 해결 방식 역시 상이하다.
콜름처럼 자신을 자해하며 결의를 보여
상대를 단념하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네가 꼴 보기 싫으면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겠다는 것이고
그 대가를 달게 받겠다는 것이
차라리 덜 비겁한 파우릭의 방식이다.
근본적으로는 원인은 가치관의 차이다.
콜름이 손가락을 자르기 직전
둘은 펍에서 바로 이 문제로 설전을 벌였다.
파우릭은 다정(nice)했던 콜름이
더 이상 다정하지 않다고 푸념했다.
콜름은 이런 17C 사람 중에 다정함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이는 없지만 당시의 위대한 음악, 그림, 시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모짜르트처럼.
파우릭은 어머니, 아버지, 동생의 다정함은
자기가 살아있는 한 영원히 기억할거라 항변한다.
파우릭은 콜름에게 묻는다.
동네바보 도미닉을 학대하고
때리는 경찰관 아버지와도 어울리면서
자기가 그보다 못한 것인지.
어찌 보면 주인공은 아무 생각 없는 멍청이는 아니다.
나름의 가치관이 있고 이에 부합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술집에서 파울릭의 다정함에 대한 항변을 들은
콜름은 그가 처음으로 재미있었고
다시 좋아지게 생겼다고 푸념을 던졌다.
도미닉의 전갈에 파우릭을 찾아온 여동생은
오빠를 데려가며
모짜르트는 18세기 사람이었다 지적한적이 있다.
이러한 대화는 둘 사이의 가치관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상이한 가치관, 문제인식, 해결방식의 차이는
불가피하게 갈등(전쟁)을 유발한다.
감독은 전쟁은 불가피 한 것이고
보이지 않는 무시와 외면에서 총칼의 전쟁까지
인간 군상들의 전쟁은 다양하지만
불가피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영화 속 육지에선 끊임없이 포성이 들려온다.
잠시의 고요함에 콜름이 전쟁이 끝날 모양이라고 하자
다시 또 시작할 거라는 파우릭의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세상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들도 있는 거니까.
그게 좋은 것 같다고 답한다.
결국 갈등과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차라리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성숙해지는 것
협력해서 선을 이르는 방법을 찾는 것은
어떨까라고 제안하는 듯하다.
영화 초반 멍청해보였던 주인공은
냉철한 주체로 분명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점은 오스카 7개부분에 노미네이드 되었던
마틴 맥도나 감독의 전작 '쓰리 빌보드'와도
맥이 닿아 있다.
남편에게 구타당하고 이혼당한 여주인공 밀드레드는
딸의 강간살인을 겪고, 자책하며 범인을 찾지못하는
무능한 경찰서장을 고발하며 사건에 뛰어들지만
결국 여러 갈등의 과정을 겪으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해나간다.
쓰리빌보드에서도 방화 장면이 나온다.
광고판이 불타고, 그 방화범이 있을 것 같은 경찰서에도 저항의 의미로 불을 지른다.
사실 불을 지른 건 경찰이 아니라 전 남편이었고,
전화를 걸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경찰서엔 불을 질렀다고 의심이 되는 딕슨이 화상을 당한다.
쓰리 빌보드에도
속 시원한 해결도 올바른 방법과 정의도 없다.
그저 그런 갈등 속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 뿐.
다음 단계가 한 차원 높기를 바라면서.
또한 영화에서 우리가 간과하기 힘든 인물은
동네바보 도미닉이다.
주인공 파우릭이 콜름에게 외면 당하는 동안
함께 지냈던 동네 바보 도미닉은
밤에 발을 헛디뎌 호수에 빠진 채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파우릭의 동생 시오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거절당한 그 호수에서 정말 물 건너다 죽었단다.
그는 정말 실수로 죽은 것일까?
누가 죽인 것일까? 아니면 자살일까?
영화는 콜름과 파우릭의 관계에 주목하게하지만
파우릭과 도미닉, 나아가 도미닉과 세상의 관계는
더 더 큰 생각할 꺼리를 던져준다.
콜름과의 갈등을 통해 주체로 성장한 파우릭과는
대조적으로 도미닉은 익사한 채 발견된다.
사실 우리가 공감해야할 대상이
파우릭일지 도미닉일지는 고민해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멍청한 바보들의 표상, 도미닉의 모습은
어쩜 대부분의 우리의 모습에
더 가까우면서도 멀다.
콜름에게 갑작스럽게 외면을 당한
파우릭의 심정만큼 도미닉은 큰 상심을 받았을 것이다.
파우릭은 자기도 멍청하면서(?)
도미닉을 최고의 동네바보
자기보다 하수라고 늘 생각한다.
콜름은 파우릭과 한 때 어울리다 절교를 했지만
파우릭은 도미닉을 친구로 대했던 적도 없으니
처음부터 존재 자체가 무시 당했다.
사실 영화에서 콜름에게 절교당한 파우릭과는 다르게
도미닉은 주체적으로 파우릭을 떠났다.
파우릭이 콜린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콜린의 친구를
거짓으로 고향에 돌려보냈다고 하자
파우릭을 질책하며 더 이상 좋은 사람이 아니라며 떠났다.
도미닉의 질책에 파우릭은
세상이 나를 변화시킨 거라고 항변하는 장면이 나온다.
파우릭 역시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나이스 하지만은 않았다.
파우릭 역시 그저 자신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에서 흔히 쓰는 방법들을
얼마든지 따라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끝으로 영화의 제목 '이니셰린의 벤시'는
영화 중 콜름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인생의 의미를 남기기 위해
작곡했던 곡에 붙이려던 제목이다.
파우릭이 이니셰린에 밴시는 없다고 하자
콜름은 단어중 sh가 두번 반복되는 것이 좋았다고 하며
어쩜 이니셰린에도 밴시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죽음을 예고하며 비명을 지르지 않을 뿐
가만히 쳐다보면서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걸 파우릭의 장례식에서 연주하는 상상을 하는데
피차 못 할 짓이겠지? 라고 이야기한다.
파우릭은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곡의 완성을 축하하자고 펍에서 기다리겠다고 떠났고
콜름은 4개의 손가락을 자른다.
밴시는 원래 켈트 신화에 나오는 요정이라고 한다.
전쟁과 죽음의 여신 버이브 카하가 원형으로
고대 아일랜드어 ben side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사는
요정언덕에서 온 여자를 뜻한다고 한다.
영화에서 이에 부합하는 인물이 나오는데
잿빛 망토를 입은 노파 맥코믹 부인이다.
그녀는 자신을 피하는 파우릭에게 다가가
이니셰린에 찾아올 두개의 죽음을 예언하고
파우릭과 동생에게 그 죽음이 찾아오지 않도록 기도할 것을 충고한다.
호수가 저편에서 파우릭의 동생 시오반에게 손짓하며
오라고도 하고 호수에 빠져죽은 도미닉의 시신을
아버지인 경찰관에게 알려주는 인물도 그녀다.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밴시의 존재를
왜 파우릭은 없다고 했을까?
콜름은 그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을까?
막연히 죽기만 기다리며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파우릭에게 그것 이상의 초자연적인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그의 장례식에서
이니셰린의 밴시 연주를 하겠다는 건 아닐까...
감독은 관객에게
우리시대의 밴시를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닐까
이제 죽음을 예고하며 비명을 지르지 않을 뿐
가만히 쳐다보면서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는
우리시대의 밴시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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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오랜만에 무겁지만 심오한 영화를 본 것 같다.
이 단순한 인물과 사건으로 그려낸 이야기가 며칠 동안
같은 질문을 계속 되뇌게 했다.
너의 세계는 평온한지?
평온해도 문제고, 평온하지 않아도 문제일 것 같은
어려운 질문이다.
이 영화는 진정한 평온은 일시적일 뿐이고
세상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겠지만,
그 전쟁 중에 한줌의 평온을 얻기 위하여
우린 지금도 싸우고 있다는 역설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어쩜 끝나지 않는 우리 삶의 패러독스.
감독은 그 해답 없는 질문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던지며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고
‘삶을 살라고’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런 삶은
이제 죽음을 예고하며 비명을 지르지 않을 뿐
가만히 쳐다보면서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죽음의 유령 시대 밴시의 존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삶이 삶 같아 보이지 않아도 삶이 있다고!”
마치
영화의 처음에 등장하는 다양한 논밭의 모습이
서로 얽혀 무질서 속에 질서를 자아내는 것과 같이.
충분히 심오하다고 평가받아 마땅한 영화다.
1923년 아일랜드 풍경도 좋았고
알아들을 듯 말 듯한 아일랜드 발음과 악센트도
놀라울 정도로 주제에 부합했다.
특히,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듯
파우릭을 연기한 콜린 파렐의
그 애매한 표정과 연기도 훌륭했지만
개인적으로 배리 캐오간의 연기는
볼 때마다 놀라울 뿐이다.
모처럼 친구들과 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해보고 싶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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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셰린의 밴시
The Banshees of Inisherin, 2022
한국 개봉 2023.03.15
드라마/코미디
아일랜드, 영국, 미국
15세이상 관람가
114분
감독 마틴 맥도나
주연 콜린 파렐(파우릭 설리반 역), 브렌단 글리슨(콜름 도허티 역)
케리 콘돈(시오반 설리반 역), 배리 케오간(도미닉 커니 역)
팻 숏트 등
제작 그레이엄 브로드벤트 (Graham Broadbent)
피터 체르닌 (Peter Czernin)
마틴 맥도나 (Martin Mcdonagh)
기획 대니얼 배트섹 (Daniel Battsek), 벤 나이트 (Ben Knight),
올리 매든 (Ollie Madden), 디아무이드 맥키언 (Diarmuid McKeown)
각본 마틴 맥도나 (Martin Mcdonagh)
촬영 벤 데이비스 (Ben Davis)
음악 카터 버웰 (Carter Burwell)
편집 미켈 E.G. 니엘슨 (Mikkel E.G. Nielsen)
미술 마크 틸데슬리 (Mark Tildesley), 폴 기라다니 (Paul Ghirardani)
마이클 스탠디쉬 (Michael Standish)
의상/분장 에이미 니 마올돔나흐 (Eimer Ni Mhaoldomhnaigh)
캐스팅 루이스 키에리 (Louise Kiely)
영화사 배급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수입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 (0) | 2024.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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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Walk Up, 2022 (0) | 2022.11.26 |
영화 >째즈 온 썸머 데이 (Jazz on a Summer 's Day)< (0) | 2022.09.11 |
2022년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상 작품상 (0) | 2022.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