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매달린; 머리 없는 신체(들)
박훈하(문화이론, 경성대 교수)
패기만만했던 시절, 한국의 여성과 몸을 주제로 일 년여 공부모임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첫 모임이 있던 날, 좌장이었던 초로의 여교수님이 물었다. “주부가 된다는 것은 어떤 걸까요?” 패기만만했으므로, 우린 구원자의 목소리로, 가정에 유폐된 여성의 가사노동과 성적 종속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랬는데, 한참을 듣고 난 후 우리에게 건넨 그분의 답은 매우 엉뚱하게도 이랬다. “주부가 된다는 건 밥을 잘 짓게 되거나 집안 청소와 빨래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밥을 짓고, 또 밥을 짓고, 그리고 또 밥을 짓고, 그리고 또 밥을 짓고, 또 밥을 지으면서도, 밥을 짓고 있는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복과 순환은 전혀 다른 것이다. 계절은 반복인 듯 보이지만 가이아의 숨결을 따라 반복의 궤적을 벗어나지만 시계추의 진자운동은 그저 제자리걸음, 반복일 뿐이다. 운동이 성장을 보장하지도 않을뿐더러 동력이 끊기는 순간 그 운동조차 사라진다. 오랜 인류의 역사가 남성의 근육노동에 의존해 오는 동안 여성의 신체가 오로지 남성 역사의 궤를 따라 움직이고 그 궤 속에서 길들여져 온 것처럼. 하지만 남성의 근육노동이 점점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지금, 여성들은 마침내 밥 짓는 자신들의 뒷모습을 본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은경의 이번 설치작업을 보면서,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텅 빈 부피감’이라는 매우 모순적인 언어들이 떠올랐다. 뜨개질을 하듯 한 땀 한 땀 쌓아올려 인체의 윤곽을 조형해 갔을 그의 작업은, 분명 우리의 시선이 몸의 존재론적 의미에 가닿기를 바랐겠지만, 몸의 형상이 견고하게 직조되면 될수록, 나의 시선은 몸의 형상 그 내부, 도저히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존재의 거죽’, 그 텅 빈 공간을 향하곤 했다.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여성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설치작업이 남성 몸을 조형한 것이었다면 단박에 우리는 이 몸의 형상으로부터 외화된 정신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남성의 신체와 달리 재현된 여성의 몸을 해석하는 관습적 통로는 매우 협애하고 제한적일 뿐이다. 그 때문에 여성 작가들이 여성의 주체적인 면모를 그리거나 조형하는 일은 남성 작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창의적 에너지를 쏟아야 겨우 가능해지곤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혁명적인 모습으로 여성을 재현하고자 했던 프리다 칼로조차 관습적 해석을 넘어서기 위해 화가로서의 자신의 삶 전체를 몽땅 바쳐야 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 혁명적 전위로서의 프리다 칼로의 이미지는 여성의 탈종속적인 삶을 꿈꾸었던 페미니스트로서의 프리다 칼로를 동시에 상상하지 않는 한 결코 완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은경의 이 설치작품에 접근하는 첫 번째 입구는 인간(a man)이 아닌 여성(a wo-man) 젠더의 재현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일이다. 구겨진 옷걸이에 걸려 겨우 제 부피감을 드러내는 찢어진 젖가슴이나, 무엇인가에 매달려야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몸뚱이는, 지금껏 인간의 역사가 상상하고 꿈꿔 왔던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역으로, 인간의 역사가 상상해 온 이상적 형상으로 인해 배제되어 온 타아(alter ego)의 정직한 재현에 가깝다. 아름답고 완전한 여성을 재현하는 일은 매우 손쉽게 달성되지만 인간-남성 욕망 그 너머의 존재를 재현하는 일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불가능성을 재현하고자 할 때 신체는 몸뚱이가 되고, 통합되어 있어야 할 몸뚱이는 조각조각 찢어지고, 정신으로 채워져 스스로 직립해야 할 몸뚱이는 그저 거죽으로 허물허물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형상을 통해서만 여성의 몸 위에 덧씌워진 인간-남성의 시선을 차단하고, 그래서 텅 비어버린 존재의 공백을, 아니 비워진 것의 흔적을 존재로써 상상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몸 혹은 정신; 와이어
0.3㎜ 구리 와이어는 뜨개질실처럼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재료가 아니다. 쉽게 휘어질 듯하지만 뻣뻣한 원래의 제 물성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뻗대는 그 물성 때문에 공 굴려 엮은 매듭들은 부피감을 제공한다. 뜨개질실이 직조되면 단순한 평면만 남지만 얼멍얼멍하게 부푼 와이어의 직조는 면이 아니라 입체를 구성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엉성한 직조는 제 표면이 아니라 텅 빈 입체의 내부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발이 아니라 발의 안, 가슴이 아니라 가슴의 속, 등이 아니라 등의 내부….
그 내부엔 무엇이 있을까?
늘 우린 발의 표면을 두고 발이라고 말한다. 예쁜 발, 못 생긴 발, 큰 발, 작은 발, 예쁜 얼굴, 못 생긴 얼굴, 큰 가슴, 작은 가슴. 그리하여 표면이 지배적 가치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세상에서, 밖을 드러내는 안은 그저 부차적인 존재임에도, 오히려 안은 밖을 위해 복무하고 밖을 위해 제 자리를 내어준다. 매끈한 얼굴 표면을 위해 보톡스 독을 받아들이고, 팽팽한 가슴을 위해 고어텍스와 실리콘이 놓일 자리를 마련한다. 그러니 안은 늘 이물스러운 잡것들로 채워진다. 매끈하지 않고 순수하지 않은 것들, 정형화되지 않아 명명되기 어려운 것들….
프로이트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 몸에서 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입 안은 안일까요? 식도와 위는? 그리고 창자는 안일까요?” 프로이트는 모두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가 입을 닫는 순간 입 안은 안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입속은 온갖 외부의 미생물들이 거처하는 장소이고, 이는 식도와 위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음식물로부터 영양소를 분리, 추출하는 소화라는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대장균을 포함한 다종다양한 미생물이 몸의 외부로부터 공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입 안은 완전히 청결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안과 밖은 공존을 위해 명확한 경계를 만들지 않고 상호 의존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몸속에서 가장 순수한 안은 어디일까? 엽기적이게도 프로이트는 우리 몸속에서 외부와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내부는 똥주머니와 항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 몸속에서 가장 더럽다고 치부하는 그곳.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그곳. 외면하고 싶은 그곳.
그곳이 우리의 삶이 영위되는 장소이고, 우리의 순수는 거기에 있다.
찢어진 가슴과 텅 빈 발을 본다.
찢어져 있기에, 텅 비어 있기에 저절로 거기에 시선이 머문다. 안과 밖의 경계가 지워진 거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완전하다고 믿는 매끈한 표면이 찢겨진 자리, 안전하다고 믿어온 봉합된 허상이 뒤집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제공된 이 자리에 서면, 더 이상 예쁜 발과 못생긴 발은 구별되지 않고, 큰 가슴과 작은 유방은 분별의 의미를 잃는다. 구리 와이어로 엮은, 안과 밖을 지운, 조각난 신체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궁극적인 의미는 이것일 터이다. 오랜 세월 동안 여성 신체의 표면에 새겨진 관습적 의미들, 아름답다거나 혹은 추하다고 여겨지는 표면이란, 알고 보면 그녀 자신들조차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단단히 봉합되어 전시된, 남성권력이 생산되는 장소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이 전시의 한가운데에 서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두 번째 통로는 구리 와이어의 물성이 제공하는, 표면의 관습적 허상을 뒤집어보는 일이다.
#탈주; 허물벗기; 가슴
언뜻 보면, 전시된 신체는 오랫동안 여성들의 몸을 죄어 왔던 코르셋을 연상시킨다. 딱딱하고 단단한, 벗어버릴 솔기조차 없는 그물망. 하지만 지금껏 여성들의 삶을 구획해온 이 견고한 금속 틀 한편에, 작가는 굵은 뜨개질실로 직조된 또 하나의 생경한 신체를 보여준다.
부드럽고 낯선,
재현 불가능한 대상의 위험한 경계를 넘어 재현해 낸 위험한 신체. 와이어가 빚어낸 냉소적인 신체들이 없었더라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뜨개질실의 이 따뜻한 질감은, 비록 환상일지라도, 남성의 근육노동이 가치 상실되고 있는 지금, 조금씩, 아주 조금씩 채워 가야할 여성의 즉자적 몸일지도 모른다.
이 몸에 대해, 소설가 전경린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고양이가 제 털을 핥듯이 쓸쓸하고 따스하게, 그것밖에 할 일이 없는 듯이 무료하게……. 두꺼운 슬픔의 퇴적층을 읽듯, 손등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놀라운 것은 나 자신까지도 남편과 공모해 나를 방치해왔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손가락들, 나의 무릎, 나의 등, 나의 귀, 나의 가슴, 나의 겨드랑이……. 그것이 왜 남편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나의 것이 아니던가.”(「염소를 모는 여자」 중에서)